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최고령 유가족, 101세 양인석 할머니가 가슴으로 전하는 울림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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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최고령 유가족, 101세 양인석 할머니가 가슴으로 전하는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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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현기자 작성일 :15-10-16 17:46 조회 : 8,961회    댓글 : 0건 


오는 24일 오후 2시 여주시 하동 양섬에서는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민간인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위령제가 열린다.
이 행사를 맞춰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여주유족회(회장 박영환) 최고령 유족인 양인석(101세) 할머니를 만나 증언을 들었다.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민간인으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모든 영혼들을 위로하고 유가족과 후손들의 굴곡의 세월을 되짚어 본다. <편집자 씀>


 “자꾸 자꾸~ 기억을 잊어버려,
  또렷하지가 않아,
  전쟁의 총성보다 지금은 그게 더 무서워”


"65년을 기다렸어, 지금도 그 사람이 보고 싶어"
양인석(101세) 할머니의 눈이 붉게 충혈 됐다. 100년을 넘게 버텨 오신 할머니의 입속 침은 마르셨는데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전하는 할머니의 한마디 한마디는 아주 명료하고 또렷하게 귀보다는 가슴 속에 먼저 닿는다.

양인석 할머니는 1915년 2월 21일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머니의 집은 안성군 이중면에서 정미소, 누륵공장 그리고 양조장까지 운영하는 부잣집이었고 할머니는 그 집의 곱디고운 외동딸이었다.
당시 일제는 강제징용으로 젊은 사람이면 누구나 붙잡아 갔다. 결국 양갓집 규수였던 할머니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17세의 나이에 결혼을 선택했다.
“그 땐 그랬어,
왜놈들 징용을 피하기 위해, 심지어 13살, 14살 여자아이들도 시집을 갔지”

할머니는 안성에서 여주로 시집을 왔다.
“친정집보다는 못했지만 시댁도 여주에서는 빠지지 않는 집이었어,
7남매를 낳을 때까지 기저귀한번 빨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할머니는 36세,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그리고 슬하에 5남2녀를 두셨다. 남편 박동흥(1912년생) 할아버지는 당시 여주읍사무소 공무원이셨다.
전쟁이 나자 여주읍내 집에서 시골 친척집인 신진리로 가족들이 잠시 피해있었다.

어느 날, 한 낮에 인민군들이 피난처로 들이닥쳤다.
마당의 닭들이 놀라 ‘퍼득’ 거렸다.
인민군들은 마당의 닭과 가축들을 인민군 전사를 위해 내 놓을 것을 요구했다.
“남편은 남의 집에 잠시 피해 있는 터라, 선뜻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맘대로 할 수 없다고 저항을 했어”

곧바로 할아버지의 가슴에 총이 겨눠졌다. 그리고 맨발로 두 팔을 머리에 올린 채 이 부부는 어린 자식들과 가족을 뒤로 한 채 인민군에 의해 끌려갔다. 한참을 가던 중 마을 이장이 길을 막고 인민군들에게 빌듯 사정을 하며 무엇인가 얘기를 나누더니 급기야 이 부부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날 길을 막았던 이장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인민군에게 봉사와 부역을 하는 조건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그 무서운 총부리 앞에서 목숨을 걸고 부역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부역이 무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 것도 몰랐어”
그렇게 할아버지는 인민군 부역을 하게 됐다.

서울수복으로 인민군이 마을에서 물러가고 할머니의 가족들도 여주읍내 본가로 돌아왔다.
어느 날, 늦은 밤 12시 경,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청년들과 경찰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다짜고짜 할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여주군청 마당 옆에 큰 창고(현재 여주초등학교 강당 추정)가 있었는데 그 창고에 많은 사람을 끌고 와 가두었지, 남편도 그 곳으로 끌려갔어”

이후 할머니는 몇 차례 면회를 가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면회를 온 할머니에게 “시할머니, 어머니 잘 모시고 아이들 잘 챙기고 있어, 곧 나갈 테니까, 걱정 마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했다.
“집안일을 돌봐주는 아저씨가 한분 계셨는데
그 아저씨는 매일같이 면회 가서 남편에게 사식도 넣어주며
가족들에게 안부도 전해줬지,
그러던 어느 날 면회를 갖던 아저씨가 집에 오자마자
앞으로 면회신청도 사식도 받지 않으니 오지 말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그 사람의 생사를 알 수 없었지”

양인석 할머니로부터 또 다른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당시 여주장날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 장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UN군의 폭격이 시작됐다. 여주장날은 인산인해가 됐다. 그 폭격으로 여동생을 보고 싶어 잠시 들렀다가 이발을 하러 나갔던 양 할머니의 둘째오빠를 잃었다.
당시 이 폭격으로, 수백 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것을 포기할 즈음,
2005년 1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생겼다.
할머니와 가족들은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며 비통한 쓴 웃음을 짓는다.

양인석 할머니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여주유족회 박영환 회장의 어머니시다.
1946년 해방이 되고 여주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가 열렸다. 바로 양인석 할머니의 남편이며 박영환 회장의 아버지인 박동흥 할아버지의 독주회였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 민족항일기부터 활약한 바이올린 연주가이자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교향악단의 지휘자인 계정식 선생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울 정도였다.

 “자꾸 자꾸~ 기억을 잊어버려,
또렷하지가 않아,
전쟁의 총성보다 지금은 그게 더 무서워” 할머니의 입술이 떨린다.

여주유족회 박영환 회장은 “어머니와 같은, 당시의 기억이 증언이 되고, 기록이 되어 역사로 남겨져야 한다”고 말한다.
박 회장은 또 “학살과 희생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은 유족들이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말을 하지 못하는 유족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 져야 한다. 그것이 역사 앞에 당당한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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